한국에 있을 때 우리 부부가 살던 집은 경복궁 근처였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사이인데다 인근에 중앙 정부기관들이 밀집해 있다보니, 항상 크고 작은 집회가 끊이질 않았죠. 프랑스 건너오기 직전에는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평일 낮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집회에서 들려 오는 구호와 노랫소리가 항상 배경음으로 깔려 있곤 했습니다. 그중 이 노래가 특히 귀에 들어 오더군요.
단결투쟁가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꺽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지겹도록 들었을 노래죠. 백무산 시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거라고 하는데 가사도 간결하고 직설적이고 가락도 아주 힘차서 백기완의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당시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불리우는 운동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힘찬 단!결! 투쟁! 뿐이다!" 부분에서 한자 한자 힘주어,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면, 없던 투쟁심도 생겨날 만큼 강렬한 곡입니다.

짐을 싸면서 귓전에 들리는 이 노래가 영 쓸쓸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작금의 상황이 이 노래와는 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년간, 두 분의 대통령과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많은 분들이 그토록 애를 써서 그나마 이만큼 대한민국을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올려 놓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나마 상식과 원칙에 기반한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는 입구에서, 저들은 그 모든 것들을 10년, 20년 전으로 돌려 놓고 있잖습니까, 한꺼번에! 이명박 집권 이후 불과 1년 반 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꾸로 향해 가고 있는지 돌이켜 보면, 우리가 반석 위에 올려 놓여졌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허약하기만 했던 것인지, 뼈저린 반성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동안의 발걸음을, 비록 진보 세력 내부에서조차 갖은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앞장 서서 이끌어 가던 두분마저,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결국 현실은, 우리는 조금씩 진보해 나갔지만 저들은 그걸 한꺼번에 되찾고 있는 겁니다. "힘찬 단결 투쟁 뿐"이라구요? 지금 정작 저들은 온통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야만의 시절로 돌려 놓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쪽 진영은 어떤가요? 온통 사분오열, 흩어져 남탓만 하기에 바쁜 형국 아닌가요.

작년에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시국 미사를 집전하시던 신부님 한분이 그런 얘기를 하셨던게 기억납니다. "끈질긴 놈이 이긴다"구요. 그때의 의미는 우리가 끈질기게 저항하면 정부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뜻에 굴복할 거라는 독려의 뜻이었겠지만, 결과는 어땠나요. 결국 "끈질긴 놈"은 우리가 아니라 이명박이었던 겁니다.

흔히들 "진보는 분열해서 망하고 보수는 부패해서 망한다"고들 하지요. 그보다는 보수는 단결하기 때문에 승리한다, 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왜 단결하나요. 아니 왜 단결할 수 있나요. 간단합니다. 그들은 명분이 아니라 이권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권이 걸려 있다면 아무리 콩을 배추라 해도 철썩같이 믿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콩고물이 떨어집니다. 이명박은 그런 능력이 탁월했던 거구요. 이명박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은, 어떻게든 반드시 그 보상을 받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이명박에게 충성한 자들이 대부분 국회의원으로 당선도 되고 했지만, 개중 일부는 깨어 있는(이라기보다는 미쳐 돌아 가는 세상에서 그나마 정신줄 놓지 않고 버티고 있던)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 낙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살펴 보세요. (이재오 같은 경우는 워낙에 알려진 데다가 당내 정치 역학 관계 때문에 숨을 죽이고는 있지만) 다들 국회의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에 낙하산으로 내려 가서 떵떵 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어땠나요.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 동안 오로지 명분 하나만 붙들고 그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한 사람들을,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 줄 수 없었습니다. 배고픈데는 장사가 없어요. 그러면서 소위 유권자라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보통 이상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전과 14범을 청와대로, 뉴타운 사기꾼들을 국회로 보낸 바로 그 잘나 빠진 유권자들이 말이죠.

어쨌거나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단결하는 수밖에요. 설령 이명박을 임기 전에 권좌에서 끌어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후신들이 이후에도 계속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화와 인권과 인간으로서의 정신을 유린하는 것만은 막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자신을 생물학자라고 언급한 어떤 블로거의 포스팅을 읽었습니다. (출처는 까먹었습니다 죄송) 환경이 좋으면 종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지금 진보진영은 환경이 열악한데도 불구하고 왜 계속 분화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을 적으셨더군요.

고인의 말씀마따나,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인데, 어떻게 얻어낸 남북 평화인데 이제 와서 이렇게 다 무너지나요. 안될 일입니다.

Posted by vincent

2009/08/19 10:29 2009/08/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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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J국장을 보는 친일주의자의 난동

    Tracked from 뒷골목인터넷세상 2009/08/21 17:31 Delete

    몇년전 특이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모두 'yes'라고 할 때 한 놈만 뻔뻔하게 'No'라고 주장하며 이것을 '주체성, 창의성' 등으로 연결시켜 '할 말은 한다'는 신세대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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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정구 2009/08/21 06:07 # M/D Reply Permalink

    옳은 말씀이십니다. 담아갑니다.

    1. vincent 2009/08/22 23:25 # M/D Permalink

      많이 퍼뜨려 주셨으면 합니다.

  2. 검은비 2009/08/22 00:24 # M/D Reply Permalink

    80년대 대학교 노래패에서 활동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vincent 2009/08/22 23:26 # M/D Permalink

      물론이죠. 나중에 한꺼번에 빼앗기더라도, 그래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적어 본 글입니다.

  3. 향수도사 2009/08/22 00:42 # M/D Reply Permalink

    생물학적으로 설명드리면 한 번 나빠진 환경에서는 치유하지 않는한 나쁜 세균들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즉 건강함 몸에서는 설령 나쁜세균이 침투한다고 하더라도 발병을 하지 않지만 병약한 몸에 나쁜세균이 침투하면 하루 아침에 망가지지요. 이렇듯 좋은 세균과 나쁜세균이 서로 공존 하되 나뿐세균이 넘치지 않도록 투약하고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세균에게 물어보면 다 살기위해 목숨건다고 양쪽 다 해명하네요...ㅎㅎ.

    1. vincent 2009/08/22 23:27 # M/D Permalink

      다 살기 위해 목숨 거는거겠지만 지 배때지는 부르면서 남의 것까지 뺏으려고 못살게 구는 거하고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꿈틀하는 거야 어디 같겠습니까

  4. violetyoon 2009/09/30 15:26 # M/D Reply Permalink

    네이버블로그로 감사히 담아갑니다.
    저같은 고등학생에게 쉽게 읽히는 글은 오랜만이네요.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1년 반가량.. 우리는 왜이렇게나 한발자국 멀리서 관망하고만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흑과 백을 명확히 밝혀 스스로 납득시키는것이 왜 이렇게도 힘이드는걸까요... 남은 3년이 너무나 멀고도 험합니다. 하지만 남은 3년을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3일을 직시하는 국민이 됐으면..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튼튼한 국민이되고 국가가 될때가 빨리 찾아오면 좋겠네요...

  5. 비밀방문자 2009/11/19 00:43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vincent 2009/11/25 15:37 # M/D Permalink

      제목 잘못 쓴 것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작금의 상황이 딱 저렇게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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