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한 친구 P는 한번도 직장을 옮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동안 직장이 알아서 바뀌었죠. 그는 KAIST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지도 교수가 설립한 벤쳐 기업으로 직행했고, 박사 논문 주제로 연구하던 내용을 사업화 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이 회사는 얼마 후 미국 회사의 투자를 받으면서 조직과 인력도 합쳤습니다. 한국과 미국에 각각 연구소를 두었는데 이 친구는 (자신의 의지와 크게 상관 없이 어디까지나 회사의 필요에 의해) 미국 쪽으로 옮겨 가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쪽 지분은 점점 줄어 갔고, 지도 교수도 발을 빼면서 점차 지도 교수/학교와 상관없는 별개의 독립적인 미국 회사로 되었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미국 현지 벤쳐 회사 직원이 된거죠. 다행히 연구 및 사업 성과는 괜찮았는지 나중에 우리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글로벌 대기업이 이 회사를 인수했고, 제 친구는 그 회사의 본사 수석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지금 캘리포니아에 큰집 사서 부동산 발 금융 위기에도 끄떡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저의 학교/직장 선배인 L형은 여러 번 직장을 옮겼지만, 자신이 먼저 찾아 나선 적은 없습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O라는 외국계 대기업에 취직한 그는 독보적인 성실함으로 항상 주변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호주에 출장 갔을 때 잠깐 함께 일한 또다른 글로벌 기업(P라고 하겠습니다) 관계자의 눈에 들었고, 이 회사가 한국 지사를 낼 때 핵심적인 역할을 제의 받았습니다. 위험이 컸지만 받아 들였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P사의 제품은 통신사를 대상으로 하는 고가의 소프트웨어(보통 계약 금액만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이고 세일즈 사이클도 길어서(최소 2~3년), 우리나라처럼 폐쇄적인 좁은 시장에서는 모 아님 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통신 3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회사가 도입한 솔루션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년의 영업 끝에 신중하게 선택해서 접근한 모 통신사가 결국 P사 솔루션을 구매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본사에서는 미련없이 한국 지사를 폐쇄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일한 협력사 사장님이 이 형을 너무 좋게 봤기 때문에, 설득 끝에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비록 이름 없는 중소기업이지만 이 형은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회사의 인력과 자금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싱가폴에 출장 가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애초에 박차고 나온 외국계 대기업(O사)의 본사 쪽 사람들과 협력을 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P사는 한국 지사 철수 이후 O사에 인수 합병되어 버렸고, 이때 만난 사람들은 P사 출신으로 O사에 흡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P사에 있을 때부터도 알고 지냈던 이 사람들의 설득으로 이 형은 다시 O사에 들어 가게 됩니다. 먼 길을 돌아 결국 제자리로 왔지만, 어쨌든 열심히 살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경험과 인맥을 쌓았지요.
저는 항상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고, 가능성이 보일 경우 그걸 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SW를 국내에 도입하는 일도 해봤고, 반대로 국내 기술을 외국에 판매하는 일도 해봤습니다. 신생 벤처에서 개발 팀장을 하면서 사무실 셋업부터 직원 채용까지 일일이 제가 해야 하는 경험도 했고, 국내 대기업 기획실에서 신사업 기획일을 하며 말도 안될 만큼 경직된 조직 구조에서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도 했습니다. 회사가 망하거나 부서가 통째로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옮긴 적도 있었고, 일이 잘되고 능력도 인정 받아 더 있으면 충분히 승승장구 할 수 있었는데도 불확실한 기회를 찾아 미련없이 박차고 나온 일도 있었습니다. 항상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력서 다듬는데 나름 이력이 났고 꾸준히 연락하는 헤드헌터도 몇 명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글로벌 기업의 거대한 조직에서 나름 꼬물거리며 존재감 느껴지는 일을 해보려 애쓰고는 있는데, 여전히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한 궁리는 멈춰지지 않습니다. 이젠 나이도 있고 제 경력 자체가 촐랑거리며 요리조리 옮겨 다니기에는 너무 무거워져 버린 관계로 전보다 신중해지긴 했습니다만, 앞으로도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09년 현재, IT 계열 다국적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저를 포함) 3인이 지난 십수년 간 걸어 온 길들입니다.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지만, 스타일은 확연하게 갈립니다. 각자의 선택에는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고 누가 더 나은 길을 걸어 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아직 앞길이 창창하지만 사실 상 경력의 반환점을 돌아 가고 있는 중인 이들의 미래가 어떨 지, 궁금합니다.

"아로마 테라피 쪽으로 전향할까 생각 중이야" 출처: cartoonstock.com

"[직업 상담] 그래 그건 알겠고...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 말고 혹시 다른 목표는 없니?" 출처: cartoonstock.com
Posted by vincent